호잘리 집단 학살
호잘리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가운데 행정 상 아르메니아 경계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거주지로서 칸켄디(스테파나케르트)의 아그담-슈사 노상에 위치해 있으며, 그 인근에는 아스케란 공항이 위치하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갈등이 시작되기 바로 전 민간 공항 유치로 인해 통신설비상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호잘리는 메스케티안 투르크 난민과 아르메니아로부터 추방당한 아제르바이잔 난민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내부 인종 간의 유혈마찰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1992년 2월, 호잘리 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인종을 말살하는 전례 없는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호잘리 집단학살’로 알려진 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인해 수천 명에 이르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말살되거나 생포되면서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1992년 2월 25일과 26일 사이 아르메니아의 무장병력은 과거 호잘리를 점령한 적 있는 구-소련 보병연대 N366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장악했는데, 이 지역은 총넓이 0.94 sq.km인 아제르바이잔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속한 작은 마을로서 갈등이 있기 전에는 약 23,75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비극 전날 밤 마을에 남아있던(약2500명) 호잘리 주민들은 학살이 일어난 직후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사는 인근지역으로 피신가면 생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집을 버리고 떠났지만 침략자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이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며 희망을 짓밟았다.
수백 명의 무고한 주민을 잔인하게 밟아버린 호잘리 학살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인근에 무장병력이 주둔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 가운데 가장 극악무도한 학살이었다. 한 인권보호 위원회에 따르면, 호잘리 집단학살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발생한 사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이었다. 아르메니안 무장병력과 외부로부터 지원된 병력이 호잘리와 인근 지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결과 106명의 여성, 63명의 어린이 및 노인 70명을 포함해 총 613명이 사망했다. 1,275명에 달하는 주민이 인질로 잡혔으며 150명은 아직도 신원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6세 미만의 어린이 76명을 포함해 487명의 호잘리 주민이 가혹한 학대로 인해 불구가 되었고, 가정과 가족이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26명의 아이들이 양부모를 모두 잃고 그 외130명의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게 되어 편부모 가족이 되어야 했다. 실종된 자들 가운데 56명은 끔찍한 상태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산 채 불에 태우고 피부를 벗기거나, 목을 자르고 안구를 척출하고, 임산부의 복부를 총검으로 찌르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호잘리 지역을 벗어나려던 난민들은 아르메니아 군사 경계지역을 도망치던 중 노상에서 총을 맞았다. 일부 난민은 아그담으로 도망쳤고 일부 여성과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산간 지역을 이리저리 배회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키체바니크와 피르자말 마을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집단학살 범죄에 대한 국제법상의 정의는 1948년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법의 제 2조항과 3조항에 잘 명시되어 있다. 언급된 문서에 따르면, 제 2조항은 집단학살을 다음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1) 정신적 요소, 즉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한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집단 내지 그와 유사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
2) 신체적 요소, 제 2조항 a/b/c/d/e 에 설명된 5가지 요소들 중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된 범죄는 ‘집단(혹은 대량)학살’로 규정할 수 있다.
제 3조항은 처벌이 가능한 집단학살 범죄를 5가지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집단학살; 음모, 선동, 시도 그리고 공모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 위원회의 회의록 발췌
“제 2조항”: 현재 회의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집단학살은 아래 언급된 사례 가운데 말살 의도를 지닌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바이며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한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집단 내지 그와 유사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다음과 같은 의도나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a) 그 집단의 일원을 죽이는 행위
(b)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
(c)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삶을 파괴를 목적으로 생존의 필수조건에 고의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
(d) 집단 내에서의 출산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조치를 취하는 행위.
(e) 한 집단의 아이들을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집단으로 옮기는 행위.
“제 3조항”: 아래의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이 가능하다.
(a) 집단학살;
(b) 집단학살을 저지르려는 음모;
(c) 집단학살을 공개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고무/자극하는 행위;
(d) 집단학살을 실행에 옮기려는 시도;
(e) 집단학살에의 연루 혹은 공모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 위원회”에 따르면, 호잘리 사건은 명백하게 ‘아르메니아인이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집단학살’로 정의된다.
1992년 2월 26일 발생한 호잘리 집단학살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선 인류에게 아주 치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이유는, 이러한 집단학살을 주도하여 실행에 옮긴 이들 중 일부는 당시 아르메니아 시민그룹과 군 세력의 지휘자들 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적인 역사를 조명해보면 잔인한 대량학살을 경험한 나라들이 더러 있다. 그 중에는 일부 가해자들이 스스로 인정했거나 기소되었던 경우도 있었기에 아제르바이잔 또한 호잘리 집단학살과 관련해 국제사회나 국제 법률 기관으로부터의 정당한 반응(제재조치)을 기대하고 있다.
호잘리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가운데 행정 상 아르메니아 경계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거주지로서 칸켄디(스테파나케르트)의 아그담-슈사 노상에 위치해 있으며, 그 인근에는 아스케란 공항이 위치하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갈등이 시작되기 바로 전 민간 공항 유치로 인해 통신설비상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호잘리는 메스케티안 투르크 난민과 아르메니아로부터 추방당한 아제르바이잔 난민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내부 인종 간의 유혈마찰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1992년 2월, 호잘리 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인종을 말살하는 전례 없는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호잘리 집단학살’로 알려진 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인해 수천 명에 이르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말살되거나 생포되면서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1992년 2월 25일과 26일 사이 아르메니아의 무장병력은 과거 호잘리를 점령한 적 있는 구-소련 보병연대 N366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장악했는데, 이 지역은 총넓이 0.94 sq.km인 아제르바이잔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속한 작은 마을로서 갈등이 있기 전에는 약 23,75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비극 전날 밤 마을에 남아있던(약2500명) 호잘리 주민들은 학살이 일어난 직후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사는 인근지역으로 피신가면 생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집을 버리고 떠났지만 침략자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이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며 희망을 짓밟았다.
수백 명의 무고한 주민을 잔인하게 밟아버린 호잘리 학살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인근에 무장병력이 주둔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 가운데 가장 극악무도한 학살이었다. 한 인권보호 위원회에 따르면, 호잘리 집단학살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발생한 사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이었다. 아르메니안 무장병력과 외부로부터 지원된 병력이 호잘리와 인근 지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결과 106명의 여성, 63명의 어린이 및 노인 70명을 포함해 총 613명이 사망했다. 1,275명에 달하는 주민이 인질로 잡혔으며 150명은 아직도 신원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6세 미만의 어린이 76명을 포함해 487명의 호잘리 주민이 가혹한 학대로 인해 불구가 되었고, 가정과 가족이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26명의 아이들이 양부모를 모두 잃고 그 외130명의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게 되어 편부모 가족이 되어야 했다. 실종된 자들 가운데 56명은 끔찍한 상태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산 채 불에 태우고 피부를 벗기거나, 목을 자르고 안구를 척출하고, 임산부의 복부를 총검으로 찌르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호잘리 지역을 벗어나려던 난민들은 아르메니아 군사 경계지역을 도망치던 중 노상에서 총을 맞았다. 일부 난민은 아그담으로 도망쳤고 일부 여성과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산간 지역을 이리저리 배회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키체바니크와 피르자말 마을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집단학살 범죄에 대한 국제법상의 정의는 1948년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법의 제 2조항과 3조항에 잘 명시되어 있다. 언급된 문서에 따르면, 제 2조항은 집단학살을 다음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1) 정신적 요소, 즉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한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집단 내지 그와 유사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
2) 신체적 요소, 제 2조항 a/b/c/d/e 에 설명된 5가지 요소들 중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된 범죄는 ‘집단(혹은 대량)학살’로 규정할 수 있다.
제 3조항은 처벌이 가능한 집단학살 범죄를 5가지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집단학살; 음모, 선동, 시도 그리고 공모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 위원회의 회의록 발췌
“제 2조항”: 현재 회의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집단학살은 아래 언급된 사례 가운데 말살 의도를 지닌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바이며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한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집단 내지 그와 유사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다음과 같은 의도나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a) 그 집단의 일원을 죽이는 행위
(b)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
(c)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삶을 파괴를 목적으로 생존의 필수조건에 고의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
(d) 집단 내에서의 출산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조치를 취하는 행위.
(e) 한 집단의 아이들을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집단으로 옮기는 행위.
“제 3조항”: 아래의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이 가능하다.
(a) 집단학살;
(b) 집단학살을 저지르려는 음모;
(c) 집단학살을 공개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고무/자극하는 행위;
(d) 집단학살을 실행에 옮기려는 시도;
(e) 집단학살에의 연루 혹은 공모
“집단학살 예방 및 처벌 위원회”에 따르면, 호잘리 사건은 명백하게 ‘아르메니아인이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집단학살’로 정의된다.
1992년 2월 26일 발생한 호잘리 집단학살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선 인류에게 아주 치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이유는, 이러한 집단학살을 주도하여 실행에 옮긴 이들 중 일부는 당시 아르메니아 시민그룹과 군 세력의 지휘자들 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적인 역사를 조명해보면 잔인한 대량학살을 경험한 나라들이 더러 있다. 그 중에는 일부 가해자들이 스스로 인정했거나 기소되었던 경우도 있었기에 아제르바이잔 또한 호잘리 집단학살과 관련해 국제사회나 국제 법률 기관으로부터의 정당한 반응(제재조치)을 기대하고 있다.